휠체어리프트 타려다가 사람이 죽었는데… 법원은 “장애인 차별 아니다” 판결
법원, 1심에서 자세한 이유 설명도 없이 15초 만에 선고
원고 측, 항소 계획 밝히며 “전 역사에 엘리베이터 설치될 때까지 싸울 것”
등록일 [ 2019년06월14일 18시27분 ]
14일 오전 10시, 서울남부지방법원 310호에서 장애인차별구제청구소송 선고가 이뤄졌다. 법원은 휠체어이용자 5명이 서울교통공사에 제기한 소송에 대해 ‘기각’ 판결을 내렸다. 이에 소송인단은 기자회견을 열고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허현덕
“지하철에서 휠체어리프트를 타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보다 시간이 두세배 더 걸립니다. 리프트에서 한 시간 이상 공중에 떠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리프트를 타다가 뒤로 쏠리고 밀리는 경험을 너무 자주 합니다. 리프트가 자주 고장이 나서 다른 경로와 출구를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저는 리프트로 인한 공포와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차별구제청구소송에 참가했는데, 오늘 너무 참담합니다. 어떤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기각’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너무 허탈해서 웃음만 나옵니다.” (원고, 이원정 은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1심 재판부가 ‘리프트는 살인시설’이라는 장애인들의 주장을 기각했다. 지하철 휠체어리프트 설치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선고 후 장애인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항소로 맞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14일 오전 10시, 서울남부지방법원 310호에서 지하철 역사 내 휠체어리프트에 대한 장애인차별구제청구소송 선고가 이뤄졌다. 법원은 휠체어이용자 5명이 서울교통공사에 제기한 소를 기각했다. 판결 주문은 간단히 기각 결정과 원고와 피고 측에 소송비용을 절반씩 분담하라는 내용뿐이었다. 선고는 15초 만에 끝났다. 원고 측 방청인과 변호인단은 “1여년을 기다렸는데 허탈하고 참담하다”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또한 판사가 원고 측 출석조차 확인하지 않은 것에 “수치심을 느꼈다”는 의견도 있었다.
- 휠체어리프트 위험은 현재진행형, 원고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지난 2018년 5월 18일, 휠체어이용자 5명은 서울교통공사에 △2·5호선 영등포구청역사 내 환승통로 △3·4호선 충무로역사 내 환승구간 △1·5호선 신길역사 내 환승구간 △디지털 미디어시티역사 내 이동구간 △지하철 6호선 구산역 등 5개 역에 설치된 리프트를 철거하고 안전한 편의제공 설치를 요구했다.
서울시의 ‘교통약자 이동편의시설(2018년 12월 기준)’에 따르면 서울교통공사(1~8호선)에 설치된 휠체어리프트는 71개 역에 156대다. 원고인 측이 지목한 지하철역 5곳은 급한 경사와 깊은 계단 때문에 특히 휠체어이용자에게 위험한 곳으로 꼽힌다. 이 중에서 신길역은 지난 2017년 10월 20일, 고 한경덕 씨가 리프트 추락 사고로 사망하기도 한 곳이다. 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현재 진행 중이다.
신길역에 설치된 휠체어리프트, 사진으로도 급한 경사를 확인할 수 있다. 휠체어리프트에는 ‘살인기계 리프트 철거하라!’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사진 박승원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의 자료에 따르면 1999년(혜화역, 천호역). 2000년(종로3가역), 2001년(오이도역, 영등포구청역, 고속터미널역, 발산역), 2002년(발산역), 2004년(서울역), 2006년(회기역), 2008년(화서역), 2012년(오산역) 등에서 휠체어리프트 사고가 발생했다. 인권위는 2009년 ‘휠체어리프트는 장애인에 대한 정당한 편의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휠체어리프트가 곳곳에서 휠체어이용자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추경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의원은 “충무로역이나 명동역에서 휠체어리프트를 타면 현기증이 날 정도”라며 “신길역 사고를 접하고 나도 언젠가 휠체어리프트에서 사고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며 휠체어리프트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 “기각됐지만 엘리베이터 하나둘 설치되고 있어… 변화의 시작”
휠체어이용자들의 절규에도 서울교통공사는 6번의 변론에서 ‘예산’과 ‘공간의 제약’으로 리프트를 철거하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는 힘들다고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지난 1월 30일, 서울교통공사는 ‘5호선 광화문역의 휠체어리프트를 철거하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는 공고를 냈다. 신길역도 엘리베이터 설치가 추진되고 있다.
이에 대해 원고 측은 “의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서울교통공사의 움직임이 재판부의 판결에 영향을 줬을 거라는 조심스러운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 최초록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소송 시작부터 원고가 바란 것은 ‘1역 1동선 확보’였다”며 “모든 역에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지상에서 승강장까지만 이라도, 혹은 환승할 때 승강장에서 승강장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였다”고 설명했다. 1역 1동선 확보란 장애인 등 교통약자가 타인의 도움 없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하나의 동선(지상↔대합실↔승강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예산상의 이유로 어렵다’고 비상식적인 답변으로 일관했던 서울교통공사가 소송이 진행되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있다”며 “그동안 엘리베이터 설치를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 최초록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가 판결 소감을 밝히고 있다. 손에는 ‘엘리베이터는 법적 의무’라는 손팻말이 들려져 있다. 사진 허현덕
기자회견에서는 재판부가 휠체어리프트를 ‘장애인의 편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지하철 접근 문제’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이원정 은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휠체어리프트는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하철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의 안전에 관한 문제”라며 “휠체어리프트의 오작동 또는 그에 따르는 요소로 다른 지하철 이용자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각장애인인 곽남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시각장애인 중에는 계단 난간을 짚으며 보행하는 사람도 있는데, 휠체어리프트가 운행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고 계단을 지나다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며 “비장애인도 똑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기각’으로 아쉬운 결정이 나왔지만, 항소를 통해 휠체어리프트의 위험성과 비인권적 요소를 드러낼 것이라고 다짐했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실제로 소송 제기 후에 구조상, 예산상 설치할 수 없다고 했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있다”며 “기각됐더라도 절반의 승리고, 원고들의 노력 덕분에 변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승헌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활동가는 “선고 결과만 봤을 때는 참담하기 그지없다”면서도 “지하철 전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될 때까지, 항소는 물론 시민을 상대로 휠체어리프트의 위험성에 대해 널리 알리는 일도 계속하겠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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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현덕 기자 hyundeok@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