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탑승 가능한 고속버스 시범운행에 장애인들 “눈물 난다, 하지만…”
교통약자법 시행 13년 만에 장애인도 탈 수 있는 고속버스 마련돼
휠체어 탑승 가능한 버스, 전체의 0.1%에 불과… 예산 확대 필수
등록일 [ 2019년10월28일 17시06분 ]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아래 교통약자법) 시행 13년 만에 고속버스의 휠체어 탑승 시범 운행이 시작되었다.
28일부터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탑승 가능한 총 10대의 고속버스가 서울↔부산, 서울↔강릉, 서울↔전주, 서울↔당진 간의 4개의 노선에 대해 시범적으로 운행한다. 각 고속버스에는 총 2대의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으며 하루 평균 2~3회 운행될 예정이다.
시승식에 앞서 장애인 시외이동권 투쟁을 해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는 이날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첫 시범운영의 소감을 밝혔다. 전장연은 시범사업 시행을 축하하면서도 여전히 남은 과제가 많다고 밝혔다.
28일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탑승구에서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고속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사진 박승원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은 “교통약자법 제3조에는 ‘교통약자도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휠체어 탄 장애인은 정작 이러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추석과 설 명절만 되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투쟁했었다”며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전라북도 부안이라고 밝히며 “부안에는 기차도 없고 고속버스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인데 휠체어 접근이 되지 않아 아직 단 한 번도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 본 적이 없다”며 “시외버스와 마을버스에도 여전히 장애인이 탑승 가능한 설비가 없다. 이번 시범운행을 통해 문제점을 더 많이 논의하여 앞으로 휠체어 탑승 가능한 버스 운행의 확대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장애계는 시외이동권 보장을 위하여 지난 2014년 1월 24일 설명절 맞이 버스타기 투쟁을 시작으로 5년이 넘도록 격렬한 투쟁을 해왔다. ‘장애인도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는 권리가 교통약자법,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에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은 이를 따라오지 못했다.
고속버스 휠체어 탑승 시범운영 기자회견 장에서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이 참석하고 있다. 사진 박승원
조현수 전장연 정책실장은 “교통약자법 시행 10년이 다 되도록 약 8천여 대의 시외·고속버스 중 단 한 대도 휠체어 이용 가능한 버스가 없었다”며 “매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철야농성을 진행하였는데 그 와중에 비장애인만 탑승 가능한 프리미엄 고속버스가 도입되면서 많은 장애인이 좌절했었다”고 설명했다.
휠체어 이용 가능한 고속버스 시범사업이 시행되었지만 아직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있다. 먼저 휠체어 이용 가능한 고속버스는 총 9000여 대의 고속버스 중 0.1%인 단 10대뿐이어서 매우 제한적이다. 또한 탑승을 위해서는 48시간 전에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탑승 시에는 비장애인들보다 20분 전에 도착하여 동떨어진 곳에서 별도 탑승해야 한다. 고속버스터미널이나 휴게소 환경에 대한 장애인 접근권 문제도 숙제로 남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휴게소에서 내렸을 때 장애인도 휴게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을지 미지수다.
따라서 조 정책실장은 “오늘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5년 이내 전국 고속버스의 50%를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과 예산 반영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공동대표는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신이 휠체어 때문에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있는데 죽기 전에 해결될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며 “장애인의 이동권뿐만 아니라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과 같은 모든 이들의 이동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시범사업을 넘어 본 사업으로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시외이동권 소송에서 국토교통부 및 사업자 모두 장애인의 권리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노했었다”며 “오늘 시범사업이 시작되었지만, 혹시 제대로 안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된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하였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이 ‘버스 타고 싶다’라고 적힌 옷을 입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사진 박승원
박경석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은 ‘버스 타고 싶다’라는 문구가 적힌 2001년 장애인이동권 투쟁 당시 제작한 옷을 입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그는 “18년 전에 제작한 이 옷은 색이 바래져서 글씨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긴 세월 동안 장애인이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권리를 위해 투쟁한 분노와 저항의 눈물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또한 “지금부터 5년 뒤인 2024년까지 모든 고속버스의 50%를 의무적으로 ‘휠체어 탑승 가능한 고속버스’로 교체할 수 있도록 교통약자법의 개정과 예산 반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기획재정부는 법에 명시된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를 지키고 이에 대한 예산을 반영하라”고 촉구했다.
올해 휠체어 탑승가능 고속버스에 대한 시범사업 예산은 13억 4천만 원이다. 그러나 2020년 정부 예산안 또한 13억 4천만 원으로 책정되어 있어 2020년 이후 본 사업으로의 전환 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계획을 실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떠나는 고속버스를 바라보고 있다. 28일, 시범운행이 시작되었으나 버스 대수가 0.1%에 불과한 점 등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았다. 사진 박승원
뒤이어 국토교통부 주최로 이뤄진 고속버스 휠체어 탑승 시범운영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상도 국토교통부 종합정책관은 “오늘부터 3개월 동안 휠체어 탑승 가능한 고속버스가 시범 운행된다”면서 “실제 운행과정에서의 안전, 편의성 등의 개선사항을 살피고 빠르게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기념행사가 끝난 뒤 이뤄진 시승식에서는 두 명의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직접 고속버스에 탑승하였다. 시승식에 참석한 문경희 세종장애인인권연대 대표는 “몇십 년 만에 고향인 강릉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가게 되어 감격스럽다”며 “강릉에 도착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고 싶다“고 전했다.
이가연 기자 gayeon@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