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과 층 사이는 계단이 아닌 매끄러운 경사로로 이어져 있다. 휠체어 탄 이들에게 친절해 보이는 이 경사로는 제법 가팔라서 수동휠체어는 오르기 어렵다. 2층으로 들어가면 긴 복도를 가운데 두고 열 개의 방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일반 원룸보다 아주 조금 큰 이 방에서 과거엔 네 명이 함께 살았다. 방 두 개가 가운데 화장실을 통해 이어져 있는 기이한 형태다. 중증장애인 여덟 명이 화장실 한 개를 나누어 써야 했으니, 누군가는 새벽 다섯 시부터 일어나서 씻어야 했다.
이제 이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옷장에 두고 간 몇 개의 티셔츠, 장롱 속 이불 따위가 미련 없이 방에 버려져 있다. 한때 이 건물에는 120여 명의 장애인이 수용되어 있었다.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에 있는 장애인거주시설 향유의집 이야기다. 과거 이름은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이곳이 4월 30일, 완전히 문을 닫는다. 2018년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총 76명이 지원주택으로 떠났다. 모든 시설 거주인이 지역사회로 떠나 텅 비어버린 시설이 문을 닫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날이다.
“이제 끝났어, 향유의집도 끝이야.”
“나는 이런 날이 안 올 줄 알았어.”
오늘이 마지막 출근일이 된 향유의집 사무국장 강민정의 말에 ‘진수 아저씨’가 답했다. 그들은 과거엔 거주인들의 생활공간이었으나 현재는 사무실이 된 3층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주인 수가 줄어들면서 별도의 컨테이너건물에 있던 사무실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진수 아저씨’의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어, 동림아. 3층 네 방 앞에 있다.”
잠시 후, 전동휠체어를 탄 김동림이 나타났다. 김동림이 ‘과거 김동림의 방’ 앞에서 내부를 쓱 둘러본다. ‘시설 폐지’를 기념하며 ‘마로니에 8인’ 김동림, 김진수, 한규선은 4월 30일, 향유의집을 찾았다.
김동림은 스물여섯이던 1987년 9월에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입소해 마흔여덟이던 2009년 그곳에서 나왔다. 그해, 시설 운영자인 사회복지법인 석암재단(현 프리웰)의 비리를 제보하고 비리 척결을 싸우던 시설 거주인들은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내쫓아도 자신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배고플 때 밥을 먹을 수 없고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이 시설을 나가자고 결심했다. 그 길로 보따리 싸 들고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무작정 농성을 시작했다. ‘장애인도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집을 달라’는 것이 요구였다. 농성은 62일간 이어졌고, 그 결과 전국 최초로 자립생활주택이 만들어졌다. 탈시설 정책의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마로니에 8인’의 투쟁이다.
‘마로니에 8인’은 이후에도 탈시설-자립생활운동을 이어갔다. 세상의 모든 시설을 없애고 싶었던 그들은 마침내 그들이 살던 시설을 없앨 수 있게 됐다. 장애인운동의 성과이면서 ‘마로니에 8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싸움이었다.
‘정말 시설이 폐쇄될 수 있을까’ 의구심으로 가득했던 시간을 뚫고 도착한 2021년 4월 30일은 슬프면서도 너무 좋고 뭉클했다. 김동림은 “한없이 커 보였던 시설이 오늘은 되게 조그만해 보인다”고 했다.
“시설이 왜 작아 보였냐면, 내가 나왔으니깐. 내가 계속 (시설에) 있었더라면 커 보였겠지. 시설 박차고 나올 수 있게끔 사람들이 도와주고, 그동안 나는 이만큼 컸으니깐.”
김동림이 허공에 그래프를 그리며 말했다. “시설에 있었을 때 내 삶은 이렇게 밑바닥이었어. 지금은 이만큼 올라갔지(대각선이 위로 쭉쭉 올라간다). 그런데 시설은 항상 밑바닥이니깐. 지금은 모든 시설이 다 조그만하게 보여. 아무리 좋은 시설이어도 시설은 시설이니깐.”
위에서 내려다보니 전체 구조가 투명하게 보인다는 듯, 김동림이 말했다. “우리가 외치잖아. ‘자유로운 삶, 시설 밖으로’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시설은 감옥이야, 감옥.”
‘자유로운 삶’을 말하며 김동림은 아내 이야기를 했다. 아내 미경도 탈시설 장애인이다. 시설에서 나온 김동림은 1년의 연애 끝에 2011년 미경과 결혼했다.
“시설에 있었을 때는 자유를 못 느꼈는데, 자유를 느끼고 자유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미경인 자유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보여.”
자유는 일과시간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었다. 계절마다 미경과 꽃구경 가서 느끼는 바람, 친구와 함께 먹는 맛있는 밥, 탈시설을 외치는 집회에서의 해방감. 이론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온전히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시설 밖에 있었다. 자유를 품은 김동림이 말했다. “시설에 있는 장애인들, 내가 많이 지역사회로 내보내야겠다. 그게 내 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