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소비만 남고 권리는 사라질 개인예산제
개인예산제는 장애등급제 폐지의 대안 될 수 없어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지원” 원칙 지키며 공공성 강화로
등록일 [ 2019년11월07일 14시10분 ]
한국의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는 특정 복지서비스에 대해 이용권을 제공하는 ‘바우처제도’를 통해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행 '바우처제도'는 장애인 당사자의 자립생활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고 있을까? 만일 국가가 장애인 당사자에게 복지서비스 제공을 이용권 대신 현금으로 한다면, 소비자가 된 장애인은 개인의 선택권과 자기결정권을 더욱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장애여성공감은 5일 광화문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 '2019년 IL과 젠더포럼-공동행동과 도전행동' 2부에서 ‘소비자주의와 바우처제도의 문제’라는 주제로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들과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가졌다.
장애여성공감은 5일 광화문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 ‘공동행동과 도전행동’이라는 주제로 ’2019 IL과 젠더포럼'을 개최하였다. 사진 이가연
당사자주의에 입각한 ‘바우처제도’의 도입, 왜곡된 자기결정권
이날 발제를 한 조현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에 따르면 2006년부터 시작된 ‘장애인활동보조 권리 쟁취 투쟁’에서는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중요한 원칙을 내세웠다. 바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당시 투쟁을 이끌어나간 장애운동 단체들은 공공성을 약화시키는 ‘사회서비스 시장화’를 저지하며 제도 초기부터 바우처제도에 대해 반대했다. 그러나 일부 장애계에서는 바우처제도를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될 수 있는 방식으로 여기며 바우처제도에 무비판적이거나 우호적인 의견들을 나타냈다.
이처럼 ‘자기결정권’은 ‘당사자주의’와 함께 중증장애인 중심 자립생활운동의 핵심적 가치이자 원칙으로 종종 거론된다. 이에 대해 조 정책실장은 “이러한 가치들은 차별과 배제가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있던 과거에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었지만, 당사자가 선택해야 한다는 이념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누구에게 얼마나 지원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간과했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의 활동보조제도는 바우처제도 형태로 도입되었고, 바우처제도는 자립생활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초기에 사람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조 정책실장은 “바우처제도가 ‘자기결정권’을 일종의 자격이나 능력으로 바라보게 된 결과, 초기 활동보조서비스에서는 (자기결정권이 미약하다고 판단되는) 만 18세 이하의 장애인과 발달장애인은 서비스 수급대상자에서 제외됐다”고 지적했다.
조현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실장이 '소비자주의와 바우처제도의 문제'를 주제로 발제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개인예산제도는 장애등급제 폐지의 대안 될 수 없어
서울시는 장애등급제가 단계적으로 폐지됨에 따라 ‘서울형 장애인 개인예산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서울형 장애인 개인예산제 시범사업 실행방안 개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서울시는 해당 발주서에서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함에 따라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며 이에 장애인 자신의 욕구(Needs)에 따라 삶을 계획하고 실현하기 위한 제도로써 ‘장애인 개인예산제 시범사업 방안’을 제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 정책실장은 “개인예산제를 마치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의 대안처럼 여기는 서울시의 입장이 황당하다”라면서 “자칫하다가는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의 배경과 지향은 사라지고 ‘권리를 지닌 권리주체’가 아닌,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만 남게 될 것”이라며 그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조 정책실장은 최정은(돌봄서비스까지 ‘시장화’, 이대로 괜찮은가?. 새사연 이슈진단. 2014)의 글을 언급하며 “사회서비스를 시장화하는 경우 ‘소비자 선택모델’이 악순환된다”고 말했다. 사회서비스가 시장화된다면 공급자들은 ‘비용 절감으로 인한 수익 추구’에 골몰한 나머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영세한 공급자들이 대거 양산될 것이다. 그 결과 돌봄노동자의 근로조건은 열악해지고 그만큼 질 낮은 서비스가 제공되어 이에 불만이 커진 이용자들의 이탈로 전체 이용자 규모는 축소된다. 보편적 복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조 정책실장은 “(사회서비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시장화된 상황에서 ‘선택권’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와 권리로서 접근해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예산제, ‘개인이 알아서 하라’며 정부가 개인에게 책임만 떠넘겨
장은희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조 정책실장의 발제에 동의하며 “이미 바우처제도를 통해 (복지의) 시장화를 경험했는데 이에 대한 평가도 없이 개인예산제 도입에 찬성하기는 어려운 입장”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장 활동가는 “만일 개인예산제도가 도입된다면 장애인 당사자 개인이 선택한 문제가 되어 이에 대한 책임 또한 결국 장애인 당사자나 가까운 가족이 지게 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장애인 욕구조사를 통해 복지서비스를 현금으로 환산해서 지급하는 개인예산제는 당사자가 가진 욕구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조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장 활동가는 최근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정부가 발표한 종합조사표를 거론하며 “장애인이 가진 사회적·환경적 욕구의 반영은 거의 불가능하고 서비스를 받기 위한 자격 조건은 더욱더 까다로워졌는데, 개인예산제가 도입되었을 때 당사자가 원하는 만큼 서비스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앙상한 소비만 남고 권리는 사라지는 소비자주의
제갈현숙 한신대학교 외래교수는 바우처제도 및 개인예산제와 같은 제도를 복지서비스 체계에서의 ‘소비자주의’로 해석하며 현 상황을 비판하였다. 그는 여성운동에서 차이를 중심에 둔 전개 과정을 제시하며 “여성운동에서 젠더해방의 목표는 남성되기가 아니듯 장애운동의 목표는 장애가 없는 사람되기도 아니고, 소비자되기도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서울지역장애인소비자연대’와 같은 일부 장애계가 주장하는 활동지원제도의 유연화에 대해 “유연화는 권력 관계 내에서 작용하는 권력적 언어”라며 “이용자들의 권익을 내세운 활동지원제도의 유연화가 장애인의 권리와 자립생활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회의감을 내비쳤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만일 개인예산제도에 따라 지원 서비스를 현금으로 환산한다면 개인별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같은 의료급여 수급자라도 주 3회 신장투석이 필요한 수급자와 그렇지 않은 수급자의 연간 의료급여의 양은 비교할 수 없는데, 만일 이를 예산에 따른 개인별 형평성의 문제로 제기한다면 신장투석이 필요한 환자의 의료급여는 철회될 것”이라며 우려를 내비쳤다.
나아가 복지 영역에 있어 선택권 강화라는 소비자주의에 입각한 주장을 따르게 된다면 소비자와 생산자들의 정보가 비대칭 해질 수 있는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 김 활동가는 “소비자가 구매할 때 생산자의 정보나 가격을 통제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개인의) 소비가 충분히 주체적이거나 선택 가능한 영역인지를 고려해볼 때 소비자주의는 앙상한 소비만 남고 권리는 사라지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이가연 기자 gayeon@bemin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