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한 장애인 탈시설 지원 체계를 위해선 지방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10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탈시설 자립지원 및 주거지원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탈시설과 관련한 사회서비스 전달체계와 정책 주체에 대한 고민, 탈시설지원센터의 운영과 권한의 문제, 탈시설 정책의 궁극적인 방향 제시 등이 논의됐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과제로 ‘장애인 지역사회 정착생활 환경조성’을 위해 탈시설지원센터 설치, 자립지원금 지원, 임대주택 확충, 탈시설 장애인 부양의무자 기준 우선 폐지, 유니버설디자인 환경 조성, 범죄시설 폐지 및 탈시설정책 추진을 위한 시범사업으로 대구시립희망원 문제 해결을 선정한 바 있다. 이에 2018년부터 중앙정부 차원의 탈시설 정책을 위한 연구가 이뤄졌고, 이날은 그간의 성과가 발표되는 날이었다.
10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탈시설 자립지원 및 주거지원 방안 토론회’를 경청하고 있는 참가자들의 모습. 사진 허현덕
- 탈시설 지원 체계, 무게 중심을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옮겨야
‘커뮤니티케어와 탈시설지원체계’를 주제로 발표한 김보영 영남대학교 새마을국제개발학과 교수는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탈시설 자립지원 정책이 개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앙정부에서 탈시설 정책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가 선결 과제지만, 거주시설에 대한 접근과 지원 과정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역지자체가 책임주체로 나서 구체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커뮤니티케어를 효과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기초지자체의 실질적 책임도 강조했다. 그는 “광역지자체가 중심축이라고 해도 장애인에 관한 지역사회 지원과 책임은 기초지자체가 질 수밖에 없다”며 “탈시설 준비단계에서부터 지원단계에 이르기까지 당사자에게 끊임없는 지원이 이뤄질 수 있으려면 기초지자체 중심으로 새롭게 서비스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커뮤니티케어를 정책 방향으로 정한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의 경우, 여러 가지 차이점을 보이지만 “당사자 중심의 통합성, 서비스 설계의 유연성, 서비스 구성의 다양성, 지방정부 중심의 책임성이라는 공통 요소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방정부 중심의 서비스 체계 구축은 우리나라의 실정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260여 개의 사회서비스가 파편화돼 있고, 이것을 17개 부서, 부처별로 담당자가 각기 나눠 관리하고 있다”며 “이런 중앙정부 중심적인 경직성과 나열하기식 서비스로는 탈시설 정책을 비롯한 커뮤니티케어가 제대로 시행될지 회의적”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활동지원제도 ‘인정조사’를 하고 있는 국민연금공단이 빠진 상태에서는 지역사회에서의 자립지원이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자체와 서비스공급기관, 국민연금공단 등이 거버넌스를 구축해 어떤 프로세스로 지원체계를 만들어나갈지 조정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박숙경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도 “지금까지 많은 탈시설 정책가, 탈시설 당사자를 만났을 때, 그들이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경직된 행정 체계’를 꼽았다”며 “집중적이고 유연한 탈시설 정책 마련에서 정부 주도도 매우 중요하지만 지방정부의 강한 책임성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10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탈시설 자립지원 및 주거지원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좌장인 동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발표자인 김미옥 전북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박숙경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사진 허현덕
- 단계적 탈시설 정책에서 거주시설 기능 전환해야… 한편으로 ‘시설 출구화’ 우려
박숙경 교수는 크로아티아와 미국의 탈시설 정책을 소개하면서, 이를 한국 거주시설에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크로아티아는 유럽연합과 NGO, 국가 주도로 탈시설이 추진되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2007년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하고, 2010년부터 ‘사회복지 거주시설 및 사회복지 활동을 수행하는 기타 법인의 탈시설 및 변환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 주도의 탈시설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 2014년에는 운영 계획을 마련하여 기존 거주시설을 지역사회 서비스센터, 집중적인 장기 돌봄주택 등으로 변환하거나 폐쇄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미국 탈시설 정책의 핵심은 탈시설화된 주거서비스 기준 및 재정지원 기준을 강화하고,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재정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다. 2014년에는 당사자의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보다 강화한 ’가정 및 지역사회 기반 서비스‘ 기준을 발표해 5년의 유예기간을 두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서비스 제공기관의 지원을 중단하고 있다.
박 교수는 “한국의 경우, 크로아티아의 탈시설 과정을 10년간 추진한 뒤에 미국의 민영시설 탈시설 추진 모델을 참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제안했다. 크로아티아의 사례를 참고해 우리나라 거주시설들을 ‘지역사회 기반 탈시설 거주서비스 제공기관’ 혹은 ‘집중 의료 및 돌봄 지원주택’으로 전환하거나 문제시설의 경우 폐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미국 사례를 참고해 보조금 지원을 위한 서비스 기준을 제시하고, 이에 미치지 못할 경우 유예 기간을 둬 시설 자체적으로 변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때부터는 개별 시설별 변환 계획 수립을 의무화하고 평가하여, 기준에 미치지 못한 시설 보조금은 중단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박숙경 교수의 연구가 자칫 ‘시설 출구화’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노금호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부회장은 “이러한 시설 변환이라는 의미에서의 탈시설 정책은 수용시설에서 생활시설, 생활시설에서 거주시설, 거주시설에서 거주서비스기관 등 이름만 바꾼 시설의 역사를 답습하는 것일 수 있다”며 “아무리 좋은 것처럼 포장해도 시설의 문제는 사회과학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 봐야 현혹되지 않고 본질적 문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그렇다고 현재 시설에서 일하는 인력을 무조건 나가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라며 “우리나라 현실에 맞춰 단계적인 탈시설 정책을 ‘전환’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탈시설지원센터, 재정·행정 권한 지녀야 실효성 있는 정책 이행 가능
탈시설 정책에 있어서 탈시설지원센터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모두가 공감했다. 김보영 교수는 중앙과 광역지자체를 나눠 탈시설지원센터가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앙 탈시설지원센터의 경우, 탈시설지원체계 구축과 광역 탈시설지원센터의 최소 기준 개발, 탈시설 욕구 파악을 위한 도구 개발 등의 연구사업을 수행해야 한다”며 “광역 탈시설지원센터 인력의 교육과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발언하는 김보영 영남대학교 새마을국제개발학과 교수(왼쪽)와 노금호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부회장(오른쪽) 사진 허현덕
김 교수는 광역 탈시설지원센터 설립 모형으로 △사회서비스원의 부설로 두는 ‘부설 공공기관형’ △기존 발달장애인지원센터와 통합하는 ‘통합 공공기관형’ △독립적인 탈시설지원센터인 ‘부설+독립 공공기관형’ 등 세 가지를 제시했으나, 이 중에서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사회서비스원의 부설 기관으로 두는 ‘부설 공공기관형’이 전문성 확보, 효율성과 안전성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내다봤다.
탈시설지원센터가 발달장애인지원센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행정·재정적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노금호 부회장은 “현재 발달장애인을 대변할 힘도 권한도 없는 발달장애인지원센터의 문제를 반복하면 안 된다”며 “중앙 탈시설지원센터의 경우 법정 장애인 거주시설뿐 아니라 사회복지시설 전반을 포괄할 수 있는 위상과 권한이 주어져야 하고, 광역 탈시설지원센터는 생활환경, 실제 생활권역에 따라 설립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또한 “광역 탈시설지원센터의 경우 센터장은 지자체장으로 당연직으로 임명해 시설운영과 탈시설에 관한 정치적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보영 교수는 “탈시설지원센터에 명확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탈시설지원센터장으로 지자체장이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다”며 “탈시설지원센터는 장애인 인권 옹호기관으로 공적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민간과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하기에 독립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탈시설은 평범한 보통의 삶을 지원하는 체계, 자립생활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
김미옥 전북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장애인 탈시설 과정에서의 정책지원방안’을 주제로 탈시설 장애인 당사자와 지원인력을 인터뷰하여 분석한 결과를 내놓으면서, 탈시설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연구에 따르면 많은 탈시설 장애인들은 시설생활 경험을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나 자신을 지우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들은 시설에서 벗어나는 것을 ‘결재받거나 탈출하는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탈시설 장애인들은 ‘시설을 벗어난 삶에 대해 누구도 알려주거나 권하지 않았다’고 답했다”며 “알 수 없는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기에 탈시설 정보 제공이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탈시설 장애인에게 탈시설 준비단계, 지역사회 전환단계, 지역사회 정착단계, 자립유지 단계 등의 지원이 연속적이고 유기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거주시설, 지역사회 등에 있는 이해당사자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탈시설 정책은 탈시설 장애인 당사자의 삶의 모습을 거듭 고민해야 한다”면서 “시설 안에서 평범한 삶을 영위하지 못했던 탈시설 장애인에게 평범한 보통의 삶을 지원하는 체계, 즉 자립생활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현덕 기자 hyundeok@bemin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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