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기저질환’은 무슨 의미인가?
기저질환은 지병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 지병은 낫지 않는 병, 난치병, 만성질환이다. 그런데 모든 만성질환이 몸을 바이러스에 취약해지게 하거나 면역반응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즉, 어떤 질병이 ‘코로나-19의 기저질환’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둘 사이에 유의미한 관계는 있어야 한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바이러스에 취약해지는 질병이라거나, 과도한 면역반응을 일으키므로 코로나-19의 합병증이 발생하기 쉬운 질병이라거나. 그러나 지금 ‘기저질환’은 이러한 문제의식 없이 코로나-19 감염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질병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죽음이나 감염의 원인을 기저질환, 즉 질병으로 축소하는 것은 명백히 건강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보건당국은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은 각별히 조심”하라고 하고, 언론에서는 “기저질환이 없다면” “평소에 건강하다면”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코로나-19 참사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누군가가 진단명 하나 때문에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여겨지는 장면이었다. 아픈 채로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나는 아마 앞으로도 건강하지 않을 것이다. 난치병 환자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이 고민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비과학적이고, 참사를 개인화하며, 구조를 감추는 ‘기저질환’이라는 단어는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그리고 총선이 다가와서인지는 몰라도, 코로나-19 참사와 방역의 논의는 너무도 자주 공과(功過, 공로와 과오) 판단으로 수렴된다. 한국의 방역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기사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방역 능력을 의심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방역은 어떤 토대 위에 있는가? 의료 인프라의 부족과 감염병 대책의 부재, 위험군에 어떠한 공식적 안내도 없는 세상은 무엇을 지켰는가? 매일 ‘기저질환자’가 죽는다. 의료진과 공무원들은 감염되고 지쳐 간다. 건물을 지을 때 방진 설계를 해야 하는 것처럼, 의료 인프라의 구성도 가장 힘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야 한다.
오직 건강만을 수호하는 세상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아픈 사람이 늘어나고, 바이러스가 더 자주 발생할 세상은 건강이 아닌 난치를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낫지 않는 아픈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만 모두가 생존할 수 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제물이 아니다. 우리는 치료되지 않는다. 건강의 대안은 난치다.